인류의 시대가 저물고 유인원과 퇴화한 인간들이 살아가는 황폐한 땅. 유인원 ‘시저’의 계통을 이었다고 자칭하는 리더 ‘프로시무스’는 완벽한 자기만의 제국을 굳히기 위해 남은 인간과 유인원들을 사냥하고 다닌다.
주인공은 유인원 ‘노아’다. 유인원 사이 숨어서 지내는 인류의 한 명. 그의 이름은 ‘노바’, 노아는 조언자 ‘라카’를 통해 노바를 알게 되고, 전 세대 ‘시저’의 사상에 기반한 새로운 세계를 그려 나간다.
줄거리는 노아가 독수리의 알을 얻기 위해 친구들과 절벽에 오르면서 시작한다. 다음 세대의 보존을 위해 하나만 꺼낸 ‘알’, 돌아와 칭송을 받지만, 어리석은 누군가의 욕심으로 ‘결속’을 뜻하는 알이 깨지고 그날 저녁 그는 회복을 위해 다시 숲으로 향한다. 거기서 부족원들의 시체를 발견하고, 정체불명의 또 다른 족속에게 발각된다. 오랑우탄과 흡사하게 생긴 이 부족장은 타고 온 말을 다시 보내 노아 부족의 거처를 알아내, 집을 태우고 부족원들을 납치해 간다. 모든 것을 잃은 노아는 우연히 라카를 만나 그의 선조인 ‘시저’에 대해 알게 되고, 노바와 함께 평화와 공존 그리고 궁극적 자유가 구현된 새로운 세계를 만들기 위한 여정을 시작한다.
노아는 '선과 악'의 이중성을 가진 인간을 모사한 시저와는 다른 '선'으로 일관한 리더십을 보여준다.
지배자 '프록시무스'는 인간의 문명과 이로부터 나오는 기술을 배워 유인원의 세상을, 그 중심에 서려고 한다. 시저의 연대를 뜻하는 '뭉치면 강하다'는 사상을 자신에게 끌어와 유인원들을, 자신을 숭배하도록 세뇌한다. 또 다른 메시지인 평등과는 거리가 멀다. 또한 인간의 ‘악’한 존재로 정의하고, 이를 넘어서 지배하려는 야욕을 가지고 있다.
노아는 공존과 평화를 향한다. 인간의 악함을 용인하면서 선을 믿는다. 뭉치면 강하기에 연대를 통해 프록시무스를 하나로 만든 전체의 힘으로 밀어내고, 평화를 만든다. 또한 유인원들의 목숨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제방을 무너뜨리는 인간의 잔악함을 경계한다. 불신과 의심을 품었지만 동행한다. 책(지혜)과 총(무기)들을 지닌 채 “유인원을 이것을 가질 수 없다”는 인간의 문화와 문명을 배우려 하지만, 이를 전달하지 않으려는 인류.
노아는 마지막 장면에서 노바에 죽은 라카의 목걸이를 건네며 인간과 공존에 대한 메시지를 건넨다. 인간의 ‘기술’ 같은 것이 없이도 다음 세대에 충분히 살아갈 수 있음을 의미한다. 과유불급(중용)이라… 이 장면은 인공지능(AI) 없이도 충분히 더욱 조화롭게 살아갈 수 있는 현세대에 필요한 메시지가 아닐까 싶다. 앵글을 돌리면 등 뒤에 총을 든 노바, 선과 악이라는 이중성으로 해석될지 모른다. 그보다는 어쩌면 동일 유전자를 지키기 위한 일종의 ‘정의’였을 지 모른다. 정의를 지키기 위해 드러낼 수밖에 없는 인간의 이중성, 새로 태어나 이제 배워나가는 유인원 ‘노아’의 입장에서는 그의 이중성은 이해의 차원에서 공감가능한 ‘필요’의 영역일 수 있겠다.
침팬지와 인간의 DNA는 98% 전후를 공유한다고 한다. 거의 일치한다고 하는데, 영화 차원에서 유인원과 인류를 동등하다고 가정하면 마지막 장면은 흡사, ‘세대교체’. 다시 시작하려는 구세대와 공존을 원해 손을 내미는 또 다른 새로운 세대와의 조우. 이 접점이 현재 필요한 새로운 시대의 출발일 수 있다.
시저는 연대를 통한 공존을 꿈꿨다. 노아에게 그런 시저의 사상은 새롭게 정립된다. 바로 ‘자유’다. 싸워 뺴앗고, 하나가 전체를 지배해 통제하는 세계에서 본질적 자유는 없다. 적어도 ‘불’을 의미하는 ‘총’으로 만든 세상은 결코 유지될 수 없다는 것. 성경에서 노아가 등장하는 장면이 그렇다. 마지막을 장식하는 것은 홍수, 즉 ‘물’이다. 물은 흐름은 곧 자유를 의미한다. 인간의 증식을 뜻하는 불이 결코 물을 이길 수 없다는 건 진리의 차원.
이 같은 상징은 등장 캐릭터의 이름에서도 스토리의 윤곽을 나타낸다. 멸종 위기를 맞은 인류를 영화는 ‘'에코'라고 명명한다. Echo는 영어로 메아리, 고대 그리스어로 ‘소리’라는 뜻이다. 신화 속 에코는 말하는 능력을 빼앗긴 요정이다. 살아남은 인류인 노바는 ‘Novus’라는 라틴어의 여성형으로 New(새로운)라는 의미다. 모두가 알다시피 자유와 승리의 신은 바로 여성이다. ‘노아’는 고대 인도유럽어 뿌리인 산스크리트 언어 ‘마누(Manu)’에서 유래한다. 인도 전설 소 홍수 영웅의 이름, 동시에 영어로는 Man, 이중 철자 ‘M’은 물을 뜻하는 이집트 상형문자에서 유래한다.
전편인 3부, 종들의 전쟁에서 인간의 무리를 뜻하는 인류의 마지막 모습을 대변하는 ‘대령’, 시미안 플루라는 악성 바이러스를 통해 살아남은 이들에게는 변종이 생겨나고, 인간들은 지능이 감퇴하면서 언어(말하는 능력, 소리)를 잃어버린다. 대령은 플루 전염을 막기 위해 아들까지 죽인다. 스스로 무리에서 벗어난 인간. 즉 혼자만의 세계에서 소통에 문제가 생긴 이들은 자기 말만 되풀이한다. 그러다 장벽을 구축하고, 이를 지키기 위해 전쟁을 시작한다. 영화에서 결국 불로 일으킨 문명은 물에 씌워 재만 남는다.
반면, 시저는 늘 무리와 소통한다. 인간인 대령은 시저의 눈을 보고 인간의 눈이라 감탄한다. 의사소통 능력을 잃어버린 인간은 유인원만 못한 짐승과 다를 바 없다는 메시지가 전반에 흐른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소통 능력을 잃어버린 인간은 고립되고, 짐승이 되어 간다고 말했다. '시저'나 '노아'로 구현되는 캐릭터는 위에 존재하지 않는, 균일한 전체 속 하나의 중심이자 또 다른 일원이다. 이 같은 소통과 전달의 체계 속 바이러스는 흩어져 사라질 수밖에 없다. 무리 속에서 떨어진 또 다른 고립에 전달된 바이러스는 당연히 그 안에서 증식, 재증식할 수밖에 없다. 1인 지배자인 프로시무스는 퇴화한 인간을 사냥해 노예로 삼는다. 퇴화의 전단계는 고립이다. 외로움은 단절을 뜻하고, 동시에 바이러스에 극히 취약한 상태가 된다.
여기서 오늘날 대한민국의 자화상이 그려진다. 우울증과 치매는 고립으로부터 불거진 외로움에서 온다. 외로움은 하루 담배 15개비와 맞먹는다. 누적되면 이는 초고속으로 배가 된다. 대부분 사람은 함께 있어도 외롭다고들 한다. 하지만 병적인 외로움은 다르다. 불안과 우울감이 선을 넘으면 초기 상황이 된다. 뇌의 pSTS는 상대의 언행의 맥락을 해석과 파악하는 영역이다. 이런 뇌의; 신호전달체계에 문제가 생겼을 때 세상을 잘못 해석해 버린다. 직접적인 원인은 바로 가상 세계. 이곳에 빠져 잘못 형성된 공감력이다. 올바른 인간관계 형성이 중요하다. 사회적 연결을 회복해야 한다. 직접 사람을 만나야 하고, 다른 이들도 나와 같이 완벽하지 않다고 가정하고 먼저 이해하고 공감해야 한다. 타인의 나에 대한 잘못된 해석은 어쩌면 '기본전제'라고 생각하면 된다. 모두 부족하다.
지금 한국은 자살률 1위의 국가다. 전쟁 이후 빠른 성장 그리고 이후 극한 경쟁에 치달아 파생한 문제들이 지금의 우울과 불안에서 오는 자살률 그리고 치매 환자 급증 등의 통계로 치환한 게 아닐까? 그냥 핸드폰을 보지 않았으면 한다. 어려울지도 모른다. 연결을 회복하지 않으면...그렇게 하지 않으면 행복할 수 없을뿐더러 종국에는 뇌가 망가진다. 그러다가 선을 넘으면, 돌이키기 굉장히 힘들다. 남의 이야기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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