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현대사 한 획, 김대중 전 대통령에 대해 ‘무지’
권력욕과 죽음과의 경쟁…피・땀을 열매가 현재 민주주의
‘갑질’, ‘유리천장’, ‘금수저’ 등 여전히 국민이 도태된 사회
총선 앞뒀지만, 리더의 교체가 의미하는 바는 한계가 ‘명확’
김대중이란 인물이, 그런 대통령이 우리나라에 존재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무척이나 감사한 마음이다. 내가 지금 이런 민주주의라는 제제 아래 맘 편히 일하고, 생각을 펼칠 수 있는 것이 얼마나 다행스러운 것인지.
‘박정희・전두환’이라는 군대라는 힘으로 국민 위에 군림한 두 전 대통령의 ‘권력욕’ 그리고 본인이 일련의 여러 사건을 통해 맞이할 뻔한 ‘죽음’, 김대중 전 대통령은 이 두 가지와 경쟁하는 듯 살아온 듯하다. 그의 삶은 현재 우리들에게 많은 것을 시사한다. 아니. 광주와 과거 목숨을 바쳐 자유와 민주주의라는 옳은 가치를 끌어내기 위한 선배들의 마음들이 모두 해당된다. 군부의 총칼로 광주에서 사랑하는 누군가를 잃고 ‘땅을 치며 애곡하는 우리 이웃들이 나오는 장면에서는 나도 몰래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한국사람이라면 누구나 같을 것이다. 현대사를 맺어온 우리 웃세대는 그렇게 시대의 문제에 뜨겁게 애통하는 마음이었고, 피를 흘려 싸웠고, 그 열매를 우리가 먹고 있다.
노벨평화상을 수상한 한국의 대통령.. 이제껏 ‘에이~’ 아마도 지금의 현실 삶을 살고 있는 많은 이들이 그에 대해 나와 같은 정도 아닐까 싶다. 다큐멘터리 형식으로 메세지를 고스란히 전달한 영화 형식이 그다지 극적이진 않을지 모르지만, 몇 안되는 개봉관에 35석 전체 좌석 중 28번째로 들어앉은 작은 상영관. 그마저 젊은 사람은 한두 명 뿐이었다.
당장의 의문. 왜 이런 중요한 내용을 우리 대다수는 모르고 있을까?. 책이나 글자로 안돼 영상으로 만들어졌어도, 상영관은 몇 안 되고 관심을 가지고 온 이들은 더더욱 몇 안 된다. 교육이 얼마나 주요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누구나 공감. 특히 정보, 올바른 사실은 서슬 퍼렇게 살아있어도. 왜 그것이 필요한 국민들에게 잘 전달이 되지 않을까?. 글자를 접하기 쉽지 않기 때문일까? 뭐 이렇게 영상까지 만들어질 정도가 돼야 하나. 창피한 일이지만 기자 현업에 종사하는 나마저 지금 보고 ‘오~ 이런’. 자조적인 감탄사를 속으로 내뱉었으니… 우리는 남에 대해 알고 이를 평가하고 판단하는 걸을 좋아한다. 최근 이선균 사건이 이를 확실히 방증한다. 관련 유튜브 콘텐츠와 이를 다룬 채널은 차고 넘치고, 하나의 사건으로 온갖 분야 전문가가 총동원됐다. 그런 한국인들이(나를 포함) 왜 자신의 ‘뿌리’, 우리의 역사, 근원, 부모님 세대가 피를 흘려 만든 민주주의, 즉 ‘맥’에 대해 무관심할까. ‘아는 만큼 보이는 법’. 모르면 중심은 흔들리는 것인데 말이다.
영화관을 나오면서, 지금의 한국의 현실을 돌아보게 된다. 언론은 제대로 세상 소식을 전하고 있는 것인지. 기자 경력을 돌아보면 언론사의 편집 과정에서 묻히는 기자들의 글과 생각들이 너무 많다. 국회엔 온 국민이 공을 들여 집단지성으로 만들어진 각종 법안들은 몇개나 통과됐는지. 국회에서 처리돼야 할, 아니 적어도 할 수 있는 많은 우리 이웃들의 마음들이 별 의미없이 사라지고 있다. 몇몇 정치 권력이나 검찰, 혹은 대기업을 중심으로 한 경제 이해관계로 인해 버려져 왔다. 50명 이상의 젊은이들이 죽어간 이태원 사건은 1년 후에도 여전히 명확한 이유가 밝혀지지 않았고, 대화를 통해 문제를 해결하자던 노조법이나 쿠팡을 대척해 소상공인들의 입장을 대변한 온플법, 불필요하게 집중된 고위직 공무원들의 연금. 과대한 국회의석 수, 반대급부로 치우친 만큼 대다수의 국민들은 여전히 힘들다. 스트레스가 만병의 근원 아닌가? 의학이 발달하면 뭣하나, 여전히 ‘금수저’, ‘유리천정’;, ‘갑질’, 등이 난무하고 있는 곳이 우리나라다. 법 체계는 일부의 입장을 대변하는데 치우쳐 있는 듯하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경제성장을 대기업 중심으로 끌어오다 보니 그 신화에 모두 매료되댜 못해, ‘가스라이팅’ 되고 있는 게 아닌가 싶다. 혼란스러워 본질을 보지 못하는 상황말이다. 상대를 봐야 하는데, 누군가 지칭하는 불빛만을 보고 있는 게 아닌가?.
김대중 전 대통령은 모두가 힘을 가졌다고 강조한다. 기자 역시 생각이 비슷하다. 발전이나 진보를 전개하고자 한다면, 우리 개개인 한 명, 한 명이 주인공이다. 누군가 ‘1인’이 바뀌지 않으면, 다수의 변화도 어렵다. 총선을 앞두고, 이번엔 조금 나은 지도자를 뽑아보고자 영화는 만들어졌을지도 모르지만 내 관점은 명확하다. 개개인이 ‘힘’이다. 구심점은 당연히 존재할 수 밖에 없지만, 힘이나 에너지가 한 곳으로 몰려서는 안된다. 사람이 살아가는 곳은 언어 체계가 제대로 없는 꿀벌들의 세계와는 다른 차원 아닌가? ‘1’이 모두를 떠 안은 그 세계는 엄청난 리스크를 안고 있기도 하며, 한국 사회에는 여왕벌 따위의 존재나 가능성은 애초 없기도 하고 가능치도 않다. 총선 나아가 대선 등의 선거를 거쳐, 새로운 리더가 누가 될지는 몰라도, 그렇게 구심은 바뀌어도, 딱히 드라마틱한 변화는. 기대하기 힘들다. 결국 세계를 판단하고 평가하고 살아가는 ‘당신’, ‘우리’가 주인공이 되고, 힘을 가져야 한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쓴 글들을 자세히 한번 읽어볼 계획이다. 아마도 이런 생각과 맥락이 닿지 않아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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